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그리스 침공 (문단 편집) == 교착기 == 한편 [[나치 독일]]과 [[아돌프 히틀러]]는 애당초 [[그리스]]를 포함한 지중해-북아프리카 전선에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오히려 제멋대로 그리스를 침공한 이탈리아에 화를 내고 승전 중인 그리스에 축전을 보냈다. 당시 그리스 군사 정권을 이끄는 메탁사스 총리가 친독 성향 인물이었기에 히틀러는 그리스를 [[추축국]]에 끌어들이려고 엄청나게 애를 썼고 하다못해 추축국에 우호적인 중립국 수준으로 남아도 매우 이득되는 상황이었는데 쓸데없이 이탈리아가 그리스를 침공하면서 그게 다 틀어졌기 때문이었다. 이는 1941년 당시 독일 육군은 1940년 12월 18일 히틀러가 내린 총통 명령 제 18호에 따라 '''독소전쟁'''을 준비하고 있었고 공군과 해군의 경우 대서양과 영국 해협에서 이미 피터지게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지중해 방면으로 전력을 투사할 여유가 없었기 떄문이었다. 그러나 이탈리아가 [[트롤링|하도 못싸워서]] 전선에서 이탈할 가능성과 함께, 남지중해 지역에서 영국군이 세력을 확대할 조짐이 보이자 결국 독일은 지중해-북아프리카 전선과 발칸반도 개입을 결정했다. 북아프리카에는 [[에르빈 롬멜]]을 사령관으로 하는 아프리카 기갑군단이 파견되었고, 발칸반도에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침공하고 [[루마니아 왕국]], [[불가리아 왕국]]을 추축국에 가담시켜 육상로를 확보한 다음, 그리스에 개입하였다.[* 이런 결정에는 히틀러가 그리스에서 영국 폭격기들이 출격할 경우, 루마니아의 플로이에슈티 유전이 작전권이란 점이 영향을 미쳤다. 플로이에슈티 유전은 독일이 대전 기간 동안 확보한 최대 규모의, 그리고 거의 유일한 유전이었기 때문이다.] [[영국]]도 그리스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독일의 참전계획을 눈치챈 영국은 그리스의 독립 및 안전보장을 약속하며 1941년 3월부터 비밀리에 지상군 병력을 그리스에 상륙시키기 시작, 최종적으로 약 6만여 명을 그리스에 전개했다.[* 이렇게 그리스로 지중해 영국 육군이 분산되면서 에르빈 롬멜은 북아프리카 군단의 선두 부대 도착과 동시에 본대가 올때 까지 기다리고 단단한 방어선을 구축하라는 참모부의 명령을 상큼히 씹고 공세에 나섰고 그 결과 제발 롬멜의 큰 코를 꺾어주길 바라던 독일군 참모부의 기대와 반대로 영국군은 큰 피해를 보고 만다.] 그리스는 이탈리아와는 차원이 다른 군사력인 독일의 참전을 두려워했으며 때문에 對독일 정책에 있어 매우 신중하게 접근했다. 영국의 병력지원 제의도 비공개적으로 수용했으며 독일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메탁사스 총리의 급사로 인해 새로 선출된 총리 [[https://en.wikipedia.org/wiki/Alexandros_Koryzis|알렉산드로스 코리지스]](Αλέξανδρος Κορυζής/Alexandros Koryzis)는 전임자에 비해 대외비 유지에 취약했고, 이미 영국군의 그리스 진주는 주 그리스 독일 대사관에 의해 파악된 상태였다. 그나마 그리스로서는 다행히 [[유고슬라비아 왕국|유고슬라비아]]에서 [[페타르 2세]]의 친위 쿠데타가 일어나 추축국에서 탈퇴하는 일이 벌어졌으나 그저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을 버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